사랑의교회 개척 옥한음목사님 소천 종교적인 자료

가난한 마음 지향한 교회의 나침반 보수·진보 개신교 모두에게 존경받아

세차게 비바람이 울었다. 그가 하늘로 가는 날, 땅에 남은 이들도 바람과 함께 울었다. 2일 오전 8시43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 목사가 폐암 후유증으로 소천(召天·하늘의 부름을 받음)했다. 72세.

이날 오전 11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선 임종예배가 열렸다. 덕수교회 손인웅 목사는 예배 설교에서 “한국교회의 큰 별이 하나님께로 가셨다.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 목적이다. 옥 목사께선 그 영광의 자리로 가셨다. 그러나 이 땅에 남은 우리들은 그가 그립고 또 그립다”고 말했다. 임종예배에 참석한 50여 명의 교계인사와 교인들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한국 개신교에서 ‘사랑의교회’는 묵직한 이름이다. 서울 서초동, 강남의 요지에 있는 대형교회라서가 아니다. 사랑의교회를 세우고, 이끌고, 은퇴하는 순간까지 옥 목사가 몸소 보여줬던 목회의 방향, 영성의 무게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개혁적 복음주의 진영의 거목이었다. 보수와 진보를 망라해 ‘가장 존경하는 목사’를 꼽으라면 늘 그의 이름이 올라갔다. 옥 목사는 1938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 영문학과, 총신대 신학대학원, 미국 켈빈신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에게 제안이 들어왔다. 교인 수 500명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안정적인 목회가 가능한 좋은 기회였다. 옥 목사는 거절했다. 그리고 78년 서울 강남에서 9명의 신도만으로 목회를 시작했다. 당시 교회명은 ‘강남은평교회’였다. 81년 사랑의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때만 해도 강남은 서울의 중심이 아니었다.

개척 초기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주일 예배를 보는데 작은 키에 볼품없는 여성이 들어왔다. 맨 뒷자리에서 숨다시피 설교를 들었다. 종종 눈물도 흘렸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사라졌다. 매주 그랬다. 옥 목사는 몇 번이나 그 여성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늘 놓치고 말았다. 한 달 후에야 옥 목사는 간신히 그 여성을 붙들었다. 그리고 주소를 묻고 심방을 약속했다. 찾아갔더니 그녀는 부잣집의 가정부였다. 현관 마루에 걸터앉은 옥 목사는 이혼과 자살기도, 오랜 식모살이로 범벅이 된 그녀의 기구하기 짝이 없는 인생담을 들었다. 옥 목사는 교회를 통해 그 여성 교인을 껴안았다.

그 사이에 교인 수는 점점 늘었다. 소문을 듣고, 설교를 듣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강남의 부유층과 인텔리도 많았다. 반면 교회를 위해 봉사해 오던 가난한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옥 목사는 소매를 붙들고 매달렸다. “제발 교회를 떠나지 말아 달라”며 눈물로 하소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교회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몸담기에는 너무 부담스럽다. 목사님도 사랑하고, 교회도 사랑한다. 그렇지만 우리 같은 신세가 기댈 만한 교회는 아닌 것 같다”며 떠나갔다. 그들은 주로 파출부거나 셋방살이 노동자, 혹은 구멍가게 아줌마들이었다. 식모살이를 하던 그 여성 교인은 꿋꿋하게 교회를 다녔다. 나중에는 집사도 됐다. 그러다 병에 걸려 옥 목사의 집에서, 옥 목사의 품에서 세상을 떴다. 옥 목사는 자신의 집에서 삼일장을 치렀다. 옥 목사는 목회 인생을 통틀어 그녀를 “가장 기억에 남는 성도”로 꼽았다. 이 일화는 옥 목사의 영적 지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옥 목사는 처음부터 소외된 이웃, 가난한 이웃을 위한 목회를 지향했다. 대형교회들이 세습문제로 시끌시끌했던 2003년 말에는 후임 오정현 목사에게 담임목사직을 넘겼다. 정년을 5년이나 앞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2007년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던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옥 목사는 대표설교를 맡았다. 개신교계 진보와 보수가 한목소리로 그를 추천했다. 고인은 10만 명의 청중을 향해 절규를 쏟아냈다.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복음을 변질시켰다는 주님의 질책 앞에서 자유로운 이가 얼마나 됩니까. ‘나는 아니오’라고 발을 뺄 수 있는 목회자가 얼마나 됩니까. 거룩하신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이놈이 입만 살아서 회개한 한국 교회의 종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그 절규를 ‘명설교 중 명설교’로 꼽는다.

고인은 생전에 “은퇴 후 내 목회가 자기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라는 우려를 했다. 교회를 너무 키워버렸기 때문이다. 교회가 비대해지면 내 교회론에 부합한 교회의 정신을 살리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많은 이가 옥 목사의 소천 앞에서 가슴을 친다. 그가 내밀던 영성의 나침반을 아직도 이 땅은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순씨와 3남이 있다. 장례는 5일장이며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과 서초동 사랑의교회, 안성수양관에 마련된다. 발인(천국환송예배)은 6일 오전 11시 사랑의교회에서 진행된다. 장지는 사랑의교회 안성수양관. 고인의 뜻에 따라 조화와 조의금은 받지 않는다. 02-3480-6501∼2.

중앙일보 = 백성호 기자

옥한흠 목사가 걸어온 길
▶1938년 경남 거제 출생
▶ 72년 목사 안수
▶ 78년 ‘강남은평교회’ 개척하며 목회 시작
▶ 86년 국제제자훈련원 원장
▶98~2007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 2004년 사랑의교회 원로목사에 추대
▶ 2010년 서울대병원에서 소천


옥한흠 목사의 말말말
“성도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하려다 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뒤져도 설교할 본문이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복을 약속하지만 무한하다고 하시지 않았음을 목회자는 정직하게 가르쳐야 한다.”
2008년 전국 목회자 세미나에서
“가장 중요한 대안은 목회자가 날마다 죽는 것이다. 설교를 위한 설교를 해선 안 된다. 그럼 사람은 없어지고 건물만 남는 교회가 된다. 그러니 생명을 짜는 설교를 해야 한다.”
2009년 10월 김명호 목사와 대담 중에서
“하나님을 가까이서 보는 이들은 자신의 추함을 볼 것이고, 멀리서 보는 이들은 자신의 잘남을 볼 것이다.”
2007년 7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천국의 열두 진주 문에 들어섰어요
“눈물 흘리지 마세요 예수님의 인내를 마음에 새기세요”



천국에는 열두 진주 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 갈 때 그 아름다운 진주 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진주는 인내의 상징 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오직 인내한 자, 곧 주님을 닮기 위해 인내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인내하고 세상이 주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인내하고 기뻐하며 인내한 사람만이 그 열두 진주 문을 통과해서 천국으로 입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에서 진주가 만들어 질 때까지 내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기까지
현재의 고난을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원하십니다.
달리면서 인내 합시다.
기뻐하면서 인내 합시다.
예수님의 인내를 배웁시다.
그렇게 하면 오래지 않아 고난의 어두움을 헤치고 나온 영광의 별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인내한 자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집중 해 보십시오.

-옥한흠 목사 설교 가운데









 

[미션라이프] 한국교회의 제자화를 이끈 거인이 쓰러졌다.
옥한흠 사랑의교회 원로목사가 2일 오전 8시 43분 급성폐렴으로 서울대병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향년 72세. 1990년대 한국교회에 제자훈련이란 말을 정착시킨 그는 예수에 미친 광인론을 주장하며 탁월한 설교가이자, 이론가, 개혁자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로서 명성을 높였다.

그가 평생 부르짖었던 제자화는 쉽게 말해 예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수준을 넘어 말씀 그대로 지키게 하는 훈련이었다. 즉 성도의 인격과 삶이 변화되어 교회와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옥 목사는 경남 거제 출생으로 성균관대 영문과와 총신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교단 개혁을 위한 교회갱신을위한목회자협의회(교갱협)와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한목협)의 산파역할을 했던 그는 85회의 제자훈련 지도자 세미나로 1만8380명의 목회자들에게 제자훈련의 비전을 심어줬으며, 99쇄나 찍은 저서 ‘평신도를 깨운다’로 수많은 한국교회 성도들을 사역의 동참자로 깨웠다.

증조부부터 예수를 받아들인 독실한 가정에서 자라났던 옥 목사는 평신도로 교회를 섬기고자 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에 따라 신학을 시작했으며, 네비게이토와 한국대학생선교회의 선교자료와 방법을 연구해 1명에 불과하던 대학부를 350명으로 부흥시킨 일이 있다. 기존 교회가 강조하는 교리대신 복음을, 지도자 중심에서 구성원 중심으로, 대그룹에서 소그룹으로, 행사 위주에서 양육 위주로, 일방 통행식 전달방식에서 쌍방통행식 방법으로 훈련시켰다. 제자훈련에 미친 그는 유학을 떠나기 전날까지 제자훈련에 미쳐 다음날 가족들과 간단한 인사만 하고 떠날 정도였다.

38세에 시작한 미국 유학에서 그는 제자훈련의 신학적 토대를 탄탄하게 구축했다. 미국 네비게이토 본부에서 머물며 훈련 자료를 수집하고 제자훈련을 현장에 접목시켜 성공한 교회들을 찾아다녔다. 박사학위 논문도 제자훈련과 관련된 것이었다.

옥 목사는 1978년 미국에서 돌아와 은평교회의 도움으로 서울 강남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대부분의 교회가 채택한 부흥회나 심방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당장에 아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제자훈련의 방법을 택했다. “예수의 제자를 만든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는 크리스천을 만드는 것이다. 단순히 천당에 가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과 예수님을 닮겠다는 확실한 목표를 갖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82년 출석성도가 250명으로 늘어났고 85년 1200명의 성도에 이르자 현재의 서울 서초동 교회를 지었다.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피해 지하에 예배실을 만들고 지상 마당을 넓게 만듦으로 한국교회의 새로운 건축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사랑의교회가 표방한 제자훈련 시스템의 핵심은 다락방이라 불리는 일반 교회의 구역조직에 있고 그 안에서 핵심은 순장에 있다. 교회에는 3000여개의 다락방이 있는데 다락방을 이끄는 순장은 제자훈련으로 배출된 ‘작은 목사들’이다. 순장은 새가족모임을 수료한 뒤 4년에 걸친 평신도 성경대학과 신앙특강시리즈, 가정생활 시리즈를 이수한 뒤 2년 과정의 제자·사역훈련을 받은 특공대다. 사랑의교회엔 3000명의 순장이 있는 데 이것이 사랑의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저력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12명을 데리고 3년간 훈련시킨 모델을 기본으로 한다. 즉 사람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잠자고 있던 평신도를 훈련과 교육으로 철저히 무장시켜 교회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게 바로 제자훈련인 것이다. 그는 제자훈련 지도자 세미나에서 늘 이렇게 외쳤다. “미치세요. 이 훈련을 주도하는 사람, 즉 목회자가 안 미치면 절대로 제자훈련에 성공 못합니다. 미치지 않았으면 제자훈련은 시작도 하지 마세요.”

그는 한국교회가 당면한 위기상황 앞에서 선지자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바른 목회철학의 정립, 소명자로서의 교회, 교회의 사도성, 제자도를 외쳐왔다. 특히 예장 합동 교단을 향해 “모든 지교회 및 치리회의 최고회(最高會)인 총회가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며 서슴없는 비판을 가했다. 이런 배경에서 1996년 교갱협과 1998년 한목협이 창립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순탄한 길을 걸은 것만은 아니다. 군대 복무시절부터 폐결핵에 걸려 5년간 투병생활을 했으며, 1989년 병으로 쓰러져 1년간 목회 활동을 쉬기도 했다. 2003년 은퇴하고 이듬해 폐암수술을 했지만 재발해 최근까지 중환자실 신세를 져야만 했다.

거인은 영원한 천국을 향해 떠났지만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남는다. “누가 한국 사람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교인도 자랑할 만한 그리스도인인가! 왜 이렇게 무력한 군중이 되고 말았는가! 오늘의 대한민국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지금까지 사장되어 개발되지 못했던 평신도들을 작은 목사로 만드는 것이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백상현 기자



[박용규 목사 기고]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거목(巨木), 옥한흠 목사



“나는 여러분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2003년 아름다운 세대교체를 통해 한국교계와
한국사회전반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옥한흠 목사가 2010년 9월 2일 우리 곁을
떠났다. 한국교회는 지난 해 김준곤 목사에 이어 또 한명의 위대한 지도자를 잃었다.
마치 암흑기에 태어나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는데 쓰임 받았던 모세처럼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절정에 달하던 1938년 12월 5일 경남 거제에서 출생한 옥한흠은 한국
교회 영적갱신과 개혁을 위해 자신의 온 생애를 불태웠다.

그는 한국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보내주신 지도자였다.
그는 한국교회와 민족을 가슴에 품고 제자훈련을 통해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갱신을
온 몸으로 실천하며 같은 꿈을 품은 수많은 후배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하용조 목사가 “한국교회가 낳은 가장 탁월한 목회자 중 한 분”이라고 예찬한 것은 결코
과찬이 아니었다. 일생동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자신과 가족을 뒤로 하고
‘한 사람의 제자훈련 철학’을 가지고 자신이 섬겼던 사랑의교회를 넘어 한국교회의
미래를 염려했던 옥한흠은 한국교회의 큰 별이었고, 한국교회가 배출한 위대한 개혁자
였다.
그가 남긴 발자취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옥한흠은 다음 몇 가지
점에서 현대 한국교회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첫째, 지난 1978년 사랑의교회를 창립해 짧은 기간에 그 교회를 국내외 제자훈련의
모델,복음주의 모델, 한국교회의 모델로 발전시켰다.
옥한흠은 사랑의교회를 통해 형식적인 복음주의 교회가 아닌 신앙고백적 복음주의의
가능성을 현시하며 변하는 시대 변하지 않는 복음을 너무도 효과적으로 제시했다.
복음의 순수성을 계승하면서도 복음전파의 사명을 소홀이 하지 않았고 복음의
대 사회적 문화적 민족적 선교적 책임을 구현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교회는 이동원의 말대로 “본격적인 복음주의 교회상을
한국교회에 제시한 하나의 견고한 구체적인 샘플”이었다.

둘째, 제자훈련의 저변확대를 통해 한국교회를 깨우는 사역이다.
제자훈련을 통해 평신도를 깨워 사랑의교회를 제자훈련목회의 모델로 만든 다음
그 모델을 한국교회에 공개하며 한국교회 전체를 깨우는 작업을 단행 한 것이다.
옥한흠은 성도교회 대학부 지도자 시절부터 교회에 접목시키기 시작한 후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훈련에 올인 했다.
지난 30년간 옥한흠은 일관되게 이 일을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옥한흠의 리더십 아래 국제제자훈련원의 칼 세미나를 이수한 목회자가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1만 8,000명을 넘어섰고 이들을 통해 제자훈련을 이수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수 없이 배출되었다.
7개 국어로 번역된 그의 저서 “평신도를 깨운다”는 가장 오랫동안 팔리며 제자훈련을
통한 한국교회 영적갱신의 가장 견고한 텍스트로 자리 잡았다.
목회자 중심의 한국교회에 잠자는 평신도를 깨워 교회의 주체이자 목회의 동역자로
삼는 혁명을 이룩했다.
그 결과 한국의 교회 성장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양적인 성장이 중시되던 한국교회에 질적 성장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셋째, 한국교회연합운동이다.
한기총과 한국기독교연합회로 양분된 한국교회 상황에서
옥한흠은 한경직 이후 한국교회연합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연합운동에 미온 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예장합동 출신으로 보수와 진보 모두를
아우르며 전체 한국교회 연합운동을 견인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가 진보와 보수를 넘어 연합운동을 견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교회를 깨워야 한다는
거룩한 사명을 가슴에 품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를 깨우는 그 일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교갱협을 결성하고
다시 한목협과 교단장협을 결성하여 전체 한국교회의 갱신과 일치 연합을 위해 자신의
혼을 불태운 것이다.
사랑의교회를 개척한 후에는 김명혁, 이종윤, 손봉호, 홍정길 등과 강남신학강좌를
개설했고, 예장합동교단의 영적갱신과 개혁을 위해 1996년 교갱협을 결성하고
1998년에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개혁기구로 자리 잡은 한목협과 이어 2001년
교단장협의회 결성을 견인하며 한기총과 KNCC로 양분된 한국교회의 양극화를
치유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들 연합단체들은 지난 10여 년간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선봉에서 한국교회의 일치와
화합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진보와 보수를 넘어 2004년 이후 한기총과 KNCC가 연합으로 드리고 있는 부활절연합
예배, 이 땅에 진정한 부흥을 사모하며 한국 개신교 전체가 동참한 2007년 한국교회대
부흥 100주년 기념예배 성사 배후에는 옥한흠의 노력이 지대했다.

넷째, 한국교회 영적갱신과 영적각성운동이다. 제자훈련이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제자훈련이 영적대각성전도집회와 병행하여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옥한흠 목사가 사랑의교회에 접목시켜 큰 성공을 거둔 ‘영적대각성전도집회’는 이제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교회의 새로운 갱신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옥한흠은 진정한 부흥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국교회의 부흥을 그토록 사모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말씀 중심의 제자훈련과 성령의 역동성을 축으로 하는 영적대각성전도집회 두 개의
기둥을 자신의 사역의 중심에 놓았던 옥한흠은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의 제자들,
종교개혁자 존 칼빈, 미국 제 1차 대각성운동의 주역 조나단 에드워즈를 너무도
빼 닮았다.

마지막으로 근대복음주의운동의 저변확대의 기여다. 근대복음주의운동은
성경의 권위, 복음전파, 영적각성, 사회적 문화적 책임, 연합운동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옥한흠과 근대복음주의 정신은 통하는 것이 많다.
그가 설립한 사랑의교회, 일생동안 흔들리지 않고 추진해온 제자훈련, 연합운동,
대각성전도집회, 사회복지와 대 사회적 책임, 해외선교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 사역은
근대 한국복음주의운동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는 일생동안 성경의 권위와 개혁주의 신앙에 서서 근대복음주의 운동을 견인했다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개혁파 복음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는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갖고 있으면서도 개혁과 연합운동에 앞장섰던 존 칼빈을 연상케 한다.

옥한흠은 기성교회의 한계와 문제점을 정확히 읽어내는 시대적, 역사적 안목을
겸비한 지도자였다.
1986년 제자훈련세미나를 단행한 것이나 10년 후 1996년 교갱협을 결성한 것이나 이를
토대로 1998년 한목협을 창립하고 이어 2001년 교단장협을 결성한 것 등
모두 돌이켜볼 때 조급한 것도 늦은 것도 아닌 아주 시의적절한 시점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한국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를 읽을 줄 아는 역사적 안목이 있었다.

그는 보수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진보적이고 진보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여전히 기성
교회의 자식이었다.
한국교회의 신앙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게 그 유산을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마치 맛좋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내듯 변하지 않는 복음을 변하는 시대에
진부하지 않게 전달하는 일에 있어서 그는 유난히 뛰어났다.
그는 고려파 배경에서 성장했으면서도 고려파 사람들에게 찾을 수 있는 근본주의적
잔재들이 없고 합동교단에서 교육을 받고 사역했으면서도 대 연합, 사회적 관심에
누구보다 민감했으며, 그는 박형룡과 박윤선에게서 교육을 받아 성경의 권위를 철저히
신뢰하면서도 그들에게 부족한 역사의식과 사회를 읽어내는 혜안이 뚜렷했다.
개혁파 복음주의 전통에 서서 대 사회적 문화적 민족적 책임과 한국교회 연합운동을
견인했다는 점에서 그는 한경직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가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나라를 확장해 나가셨겠지만 만약 옥한흠이
없었다면 아름다운 세대교체, 부활절연합예배, 2007년 한국교회대부흥운동 100주년기
념대성회, 기독교 사회복지 엑스포를 비롯한 최근 10년간의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발자취는 아마 성사되지 못했거나 이루어졌다 해도 그 의미가 상당히 축소되었을
것이다.
옥한흠, 그는 근대 한국교회 영적갱신과 개혁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주신 특별한 지도자
였다.
일생동안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자신의 온 생애를 불태웠던 옥한흠 그는
확실히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거목(巨木)이었다.


박용규 목사(총신대 역사신학 교수)